가을의 QT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나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요일 2:28)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
우리에게 하신 그 약속의 가치는 가늠할 수 없어서, 모래사장에 앉은 아이가 앙증맞은 손으로 파도를 한 뼘 두 뼘 재는 것 같다. 보이는 파도 또한 대양의 한 모퉁이일 따름인데, 어찌 그 손으로 크기를 알 수 있을까?
이 광대한 바다는 짠 맛을 똑같이 유지한다.
모세를 통해 노예인 백성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께서, 범죄한 다윗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 그 분께서, 지금도 같은 농도의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신다.
그 바닷가 아기가 장성한 어른이 되었지만, 어찌 모두 이해한다 할 수 있을까?
말도 안되는 큰 약속, 넘치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감사가 지속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액의 복권에 당첨된 자가 감사함을 잊고 펑펑 쓰다보니 아직도 큰 돈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줄어든 금액에 불안감을 느끼는 것과 같다. 감사의조건을 당연시 여기고 말씀을 향하던 눈이 흐려지며 화려한 세상에 잠시 집중을 하면, 어느새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빠른 속도로 멀어진다. 이 때 멈칫 멈춰서 지그시 바라보시는 그 눈길을 바라본다면 금방 회복된다. 하지만, 대부분은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에서 가장 먼 곳까지 갔을 때에야 뭔가 허전하고, 온기가 느껴지지 않고, 뭔가 잘 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세상의 화려함을 바라보고 달려 왔는데 신기루같이 사라져 있을 때에는 쉽게 돌아갈 힘도 없고, 무거워진 마음을 일으키기도 힘들다. 너무나 멀리 왔다 생각하고 좌절하고 절망할 그 때에도 어느새 등 뒤에 계셔서 나지막하게 나의 이름 부르는 이 계신다. 잃어버린 자녀를 찾아 달려 나가듯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가 아무리 빨리 멀어져도, 그 속도보다 더 빨리 안전망을 치시며, 모래성 같은 우리의 삶을 반석 위에 견고히 지을 수 있게 버팀목이 되신다.
하나님의 그 지독한 사랑, 변치 않는 붙드심 그리고 다시 이끌어 주심은 우리가 넘어지고, 허무할 때에 치료가 되며 힘이 되고 능력이 된다. 세상의 부귀 영화가 모래 위 반석인 것은 우리 삶이 끝날 때 모든 재산과 권력을 내려놓고 가는 선조들의 모습을 보면서 간접 경험한다. 부르시는 그 때까지 열심히 살아가지만, 견고한 반석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사랑과 감사가 넘치는 집을 짓는것만 남는다.
건축을 공부하지 않아도 하루를 설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고, 하루를 승리할 수 있는 성령하나님의 능력을 우리 안에 주셨으며, 마무리투수가 승리한 경기를 마무리하듯 이미 승리하신 삶을 따라 하루를 감사로 마무리하게 하신다.
이러한 삶의 반복과 연속이 끝나는 지점에서 스데반 집사처럼, 예수님이 두 팔 벌려 기다리는 순간은 상상만해도 영광스럽다. 이런 마무리는 어떤가? 죄 많은 사형수로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 모두가 예수님을 외면할 때 그 분이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구주로 영접했던 사나이. 우리가 이름대신 ‘우편 강도’라 부르지만, 자신의 죄가 다 드러나 처형을 당하는 가장 부끄러운 마지막 순간에 삶의 허무함을 걷어내고 영원의 길을 발견한 사람. 싱싱한 나뭇잎도 낙엽으로 변하는 삶의 가을에 ‘우리를 영원히 기억할 분이 있다’는 진리를 어떻게 알았을까? 비난과 조롱이 난무하는 그 시점, 죽음이 눈 앞에 와 있는 지점에서도 사랑의 끈을 내미시는 그 손을 붙잡았기 때문이며, 그 예수님의 눈에서 은혜를 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낙원의 가을 길을 걸어서 아버지의 품 가운데로 가는 그를 떠올려본다.
삶의 마지막을 부끄럼 없이 마무리한 그의 모습은 진한 향기로 코끝을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