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8. 찬양의 시간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진리의서재 2020. 11. 26. 12:30

참 사랑스러운 가사에, 감미로운 선율이다.

꽤 오랜 기간 많이 부르던 찬양이고, 위로와 위안을 많이 주는 곡이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길지 않은 가사에는  
인간에는 별로 없는 '인자함', '자비로운', '(끝없이 사랑하시는) 성실함'에 대한 하나님의 성품을 노래한다.

 

'참 아름답다 너는'이라는 노래를 부르면
너를 노래하는 것이 되고,

너를 찬양하는 것이 된다.

 

그렇듯 하나님의 성품을 노래하는 이 찬양은 참 감미로우면서, 

끝없이 사랑받는 이의 안정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 찬양의 구절을 성경에서 발견했다. 

 

예레미야애가...... ㅠ.ㅠ

5장으로 구성된 이 성경은 그냥 읽기가 좀 힘들다.

망하고, 망한 

멸망하고 멸망당한

현장의 한가운데서

종군기자가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장면 같다.

드론으로 촬영하는 영상이 아니다.

직접 자기도 피 흘리면서, 보도의 끝짱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펼쳐진다.

 

웬만한 괴로운 내용은 다 나온다. 

삶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총칼에 맞아 동족들이 죽어가고 (당시에 총은 없었겠지만)

먹을 게 없어서 사람을 (자녀란 말은 차마 못하겠네요) 먹고, 1) 

아~ 좀 슬프다가 아니라, 참혹한 현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보도하는 기자의 마음

올해의 기자상은 따놓은 당상인 듯한 보고에 한창인 가운데...

문득 예레미야 기자의 마음에 생각 한 줌 떠오른다. 2) 

 

추억한다.

기억한다.

생각이 떠오른다.

 

마치 추운 겨울날 동사 직전에

성냥팔이 소녀가 꿈을 꾸었던 것처럼

성냥 한 개의 따스함만큼이나 짧은 순간동안 

행복한 시절을 떠올린 것처럼 말이다.

 

고초를 당하고 재난의 한가운데서, 3)
쑥을 먹는 것 같은 쓰라린 현실, 고통의 한가운데 낙심이 가득할 때

한 줄기 햇살 같은 소망이 떠오른다.

 

기자의 기사를 읽어보자.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4) 

 

추운 겨울에 얼어가는 몸을 녹이는 따뜻한 환상처럼

처절한 상황 앞에서 기자가 떠올린 생각은 참 놀랍다.

 

선배 기자였던 '하바국'은 강포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하나님께 질문했다.
'왜 이런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그때 '이 어려움이 다가 아니다. 앞으로 바벨론이란 나라가 더욱 큰 어려움을 줄 것이다.'라고 대답하셨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신 심판의 날인 바로 오늘. 

선배의 시대 때 보다 훨씬 어려운 지경, 

이 참혹한 현장에서 예레미야의 마음속에는 '사랑받는 이의 따스함 같은 싯구'가 떠올랐고,
그와 우리의 찬양이 되었다.

 

자존심이 엄청 세신 분이다. 우리 하나님은.

감히 누군가와 비교당하는 것은 싫어하신다. 아니 견디지 못하신다. 

오죽했으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명령이

첫 번째 계명이었을까?

 

하나님의 사랑과 지략으로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와 생명을 찾았는데,

그 하나님을 우상과 동일시 하며 무시당하기를 몇 차례이신지

그런데도 하나님을 무시한 백성을 마침내 심판하시는데,

사실은 그 백성을 자기 자녀 삼은 하나님이 욕먹고 계시는 상황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이 훼파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성전의 기물이 옮겨져 이방 나라의 우상이 있는 곳에 두게되는 상황.

당시 전쟁에서 지면 그 신이 졌다는 풍토를 모르는 분도 아니고,  

얼마나 존심 상하고 화가나셨을까

 

그냥 불벼락 내질러서 소돔과 고모라 멸망시키셨으면,

최소한 하나님 존심에 금은 안 가셨을 텐데,

하나님 레벨에서는 하찮은 신들을 섬기는 나라의 총칼에 

당신의 자녀들이 죽고, 잡혀간 이 지점에

당신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왜~!!!!!

도대체 이런 고통을 겪게 되는지 절규하듯 물어봤을 때

사랑하는 아버지가 집나간 아들에게 말하듯,

'돌아오라, 돌이키라, 받아줄께'라고 얼마나 많이 이야기했는데,

아버지 사랑은 끝도 없는 것을 알면서도

반항하고, 변명하고, 돌이키는 척만 한 우리의 모습들 앞에

암덩이를 잘라 낼 수밖에 없는 마지막 수술을 감행하신 것인가?

 

당신의 영광이 가리어지는 것 같은 불쾌한 상황도 견디시면서, 

우리를 완전히 끝장내지 않고,

죄의 참혹한 결과를 온몸으로 겪게하시면서, 

백성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떠올린 것이 아닐까.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순간,  

눈물의 선지자로 불리는 예레미아!

그가 흘리는 눈물의 성분이 변화된다.

 

슬픔과 괴로움에 흘리던 눈물이

하나님의 아픈 심정에 죄송한 마음을 담은 눈물로 흐느낀다.

아버지의 아프고 찢겨진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원망만 했던 참회의 눈물로...

 

이제 진짜 끝짱이구나 포기한 허망한 마음에서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심중을 깨닫게 된 후의 감사의 눈물로...

변한다.

 

너무 괴로운 내용이 많아 읽기 힘들었던 예레미야애가!!!

마치 역사의 한 현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취재하는 기자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니

감격이 벅차오른다.

 

다시는 이 찬양이 달콤한 사랑의 노래같이 들리지 않을 것 같다.

예레미야 기자의 눈물에 담겨 있는  

슬픔 100%

애통 100%

감사 100%

소망 100% 의 오묘한 농도가

내 마음에도 전해진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사랑의 농도가 쉽사리 변하는 인간인지라 

이 와중에도 성실하게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완벽히 이해되지 않는다.

너무 크고 넓어서 코끼리 발바닥을 보고 있어도,

코끼리의 코와 몸통 사이즈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개미처럼 말이다.

개미 한 마리 보호하려고 그 육중한 다리를 들고 햇빛을 가려준

코끼리의 마음을 개미가 알까?

 

뭐 말도 안 되는 비유이지만,

우리는 슬픔과 참혹만을 바라볼 때에도

우리의 탄식의 날개짓에 폭풍 같은 사랑을 보여주시려는

사랑의 나비효과는 이미도 시작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성실하신 주님!

 

성실이라는 단어 앞에는 (주님의 끝없는 사랑으로 말도 안 되게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것을 멈추지 않는)이라는 긴 수식어를 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너무 길어서, 아니면 시인처럼 담백한 언어로 - 중간 생략하고 -

"성실하신 주님!"이라고 고백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

1) 예레미야애가 2.20

2) 예레미야애가 3.21

3) 예레이먀애가 3.19
4) 예레미야애가 3.2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