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4. 글쓰는 시간

책이 걸음을 멈추게 하는 순간 <영혼의 자서전>

진리의서재 2020. 12. 28. 09:19

책을 펼쳐들 때 심장이 쿵 내려앉아 더 읽어 내려가지 못할 때가 있다.

 

스승인 장 그뤼니에의 작품을 펼쳐서 처음 몇 줄 읽다가 가슴에 꼭 안고, 아무도 보는 이 없는 곳에서 미친 듯 읽고 싶다는 일념으로 한 걸음에 달려간 까뮈가 그랬을 거다.  그런 까뮈의 모습을 읽으며 내 가슴도 콩닥콩닥 뛰었다. 내가 달린 것도 아니고, 내가 그뤼니에를 읽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도대체 그 양반의 책이 어땠길래 그랬을까 싶어서 읽고 있던 까뮈를 내려놓고 그뤼니에의 작품을 찾아봤던 기억이 있다.

 

<섬>의 한 소절이었을까?

고양이 물루의 기지개 펴는 장면이었을까?

 

영혼의 치료소라는 어느 도서관의 안내 표시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책은 마음을 치료하는 힘이 있다. 독자의 눈이 저자의 글을 따라가는 순간, 저자가 풀어낸 글 속의 치료법이 독자의 눈을 타고 마음을 녹인다. 따뜻한 모닥불 앞에 앉아 있으면 얼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환자가 침을 맞을 때 치료하려는 자의 마음을 전달받는 것처럼 말이다. 때로는 내 마음이 너무 얄팍해서 책을 펴자마자 자꾸 감동받고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까(뮈)선생과 그(뤼니에)선생의 치료법이 너무 강렬해서일 것이다.

 

무시무시한 명의들~! 

서문까지는 가지도 못하고, 책 앞 표지에서 멈춰 서게 했던 책도 있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

책의 앞날개라고 해야 하나?

화살로 자신의 삶을 표현한 구절들.

그의 작품 속 주인공인 조르바나 마할레스 대장이 했을 법한 말투로 드린 기도문.

'나는 당신이 손에 쥔 활입니다.'가 아니라,
안정효 선생의 번역으로 표현된 '활이올시다~'는 표현은 
인생을 열정적으로 살아낸 우리네 부모님이나 조부모님 세대의 말투처럼 친근하다. 

 

세 가지의 영혼, 세 가지의 기도

 

첫째, 나는 당신이 손에 쥔 활이올시다, 주님이여. 내가 썩지 않도록 나를 당기고서.

둘째, 나를 너무 세게 당기지 마소서, 주님이여. 나는 부러질지도 모릅니다. 

셋째, 나를 힘껏 당겨 주소서, 주님이여. 내가 부러진들 무슨 상관이겠나이까?

 

여기서 멈춘 덕분에 꽤 오랜 시간 <영혼의 자서전>을 읽어 내려가지 못했다. 앞 날개를 읽었을 뿐인데 왠지 책 한 권 다 읽은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너무 강렬한 예고편을 본 뒤 본 편을 쉽게 예상하게 되는 부작용이 나타나 방대한 양을 읽지도 않고 '그리스에 대한 저자의 애정'과 '자유를 찾으려는 투쟁'이 잘 나타나 있을 것이라 짐작하였다. 뭐 역시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의 삶을 통해 써 내려간 언어의 화살에 묻어있는 조국에 대한 사랑과 자유에 대한 갈망이 읽는 독자의 마음에 하나씩 박히면서, 건강한 독이 퍼지듯 읽는 이의 마음도 따뜻하게 만든다.

 

영화 <300>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페르시아의 100만 대군은 맞써 싸우는 소수의 그리스 병사들을 향해 화살을 쏘아 올린다. '태양을 가릴 듯 날아오는 무수한 화살'을 방패들을 엮어 피하던 장면처럼, 카잔차키스가 쏘아 올린 문장은 둔탁한 내 감성의 방패와 세련되지 못한 지성의 방어막을 뚫고 들어온다. 수많은 화살에 맞아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전사자들이 그리스의 정신을 깨운 것처럼 글이 쏘아 올린 화살은 내 혼의 한 지축을 흔들어댔다.

 

그가 '활'이라고 묘사한 영혼의 모습을 책에서는 어떻게 그려냈을까?

이런 궁금증을 가지며 책을 읽지만 쉽게 정답을 보여주지 않는다.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써내려간 글 속의 여행지를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서 따라가 보니 과자 한 개 사탕 한 개 주워 먹듯 힌트를 얻게 되었다. 글 속에 녹아있는 신화, 철학, 역사, 문학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내 지식의 부족함때문에 교감이 만나는 광장을 스쳐 지나간 지점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에필로그에 이르러 다시 이 문장을 만나게 될 때에는 빨리 답을 얻고자 했던 내 조급증은 이미 사라졌다. 영혼과 같은 조국 그리스에 마음을 담은 편지를 보내는 저자의 화살은 큐피드의 화살과는 다른 각도로 날아와서 내 마음에 명중되었다.

 

에필로그에서 만난 문장은 사람마다 영혼이 다르니, 위의 3가지 기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1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책의 앞 부분에서 읽을 때에 점진적으로 드리는 기도문이라 생각했다.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사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첫 번째 기도이다.

하지만, 주님의 뜻을 잘 감당하기엔 연약한 자임을 스스로 알기에 나의 연약함을 도우소서와 같은 겸손한 마음이 녹아져 있는 것이 두 번째 기도라 생각했다.

그러한 연약함도 훈련이 되고 명확한 목표지점을 알게될 때면, 나 자신이 설사 손해보고 부러지더라도 그 뜻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녹아져 있는 고백에 이르게 된다. 

 

구약성경의 이사야 49장에는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어 나갈 존귀한 자를 세우시는 내용이 나온다.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하고, 이방의 빛으로 삼아서 구원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하는 사명을 지닌 자. -2 

이러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려고 그들을 잘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들신다.

그리고 화살같은 이들에게 친히 하나님이 힘이 되어주신다.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화살 같은 존귀한 자.

카(잔차키스)선생의 이 기도문은 마치 그들을 위한 기도문처럼 여겨졌다.

혹 부서질지라도 신원해주시고 보응해주시는 하나님께서 승리의 깃발을 세우실 군사로 부르신 이들. -3

 

카잔차키스는 육체와 영혼, 육체와 이성을 대비시키는데, 영혼을 지닌 자가 육체를 마음대로 다스리기 쉽지 않다는 고백을 여러 문장에 담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나의 큰 고민과 모든 기쁨과 슬픔의 샘은 정신과 육체의 끊임없고 무자비한 싸움이었다. -4

 

마치 사도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라고 고백한 것과 비슷해 보인다. 이질적인 영혼과 육체를 함께 지닌 인간의 삶이 결코 녹녹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모든 육체는 활이 될 수 있기에 모든 육체가 거룩하다. -5

는 문장에 이르면, 연약하고 부서지는 육체일지라도 '주님의 손에 붙들린 육체는 거룩하다'는 그의 고백은 고뇌에 가득찼을 작가의 고뇌에 마침표를 찍어준다. 작가 인생의 마지막에 찾은 정답 같은 문장이다.   

 

주님의 손에 붙들려 구원받을 길을 열어주기 위해 이땅에 오신 분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이 땅에서의 자신의 사명을 다 감당하신 분 

자신을 온전히 드려 죄를 단번에 속량할 어린양으로 역할을 감당해 내신 분

새벽 미명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는 영점 조절에 게으르지 않으셨던 예수님

그리고 늘 그 사실을 까먹을까봐 성령 하나님을 우리 심령에 보내주셔서 늘 예수님 기억하게 하시는 분 -6

 

자유로이 화살이 되기를 선택한 카잔차키스처럼, 

내게 주신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충실한 증인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쥐어진 하나의 화살이고 싶다.

연약하나 부러지지 않고,
설령 부러진다 해도 그분의 손 안에 쥐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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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로는 <영혼의 자서전>이지만, 영어로 된 제목은 <Report to Creco>이다. 
작가가 조국 그리스(Creco)를 자신의 영혼만큼 사랑했으니, 영혼의 자서전이란 제목이 너무도 딱 맞다. 
나의 글에 제목을 붙인다면 <Report to Christ> 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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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잔차키스, <<영혼의 자서전(하)>>, <에필로그> 안정효 역. 열린책들.

2. 이사야 49장 6절

3. 이사야 49장 4절, 22절 

4. 카잔차키스. <<영혼의 자서전(하)>>, <사막-시나이> 안정효 역. 열린책들.

5. 카잔차키스. <<영혼의 자서전(하)>>, <에필로그> 안정효 역. 열린책들.

6. 요한복음 14장 2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