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의 여정
구름속에서 총성이 울린다. 3-2-1-go!
구름사이를 출발하여 오늘의 모험이 시작된다.
늘 다녔던 길이라 네비게이션도 필요없다.
지상에서야 밤 하늘의 별자리를 기준삼겠지만,
우리, 빗방울은
자유로운 낙하를 허락받았다.
출근 시간은 태양의 출근과 겹친다.
조금만 늦게 나와도, 햇살의 뜨거운 굉음이 온 트랙을 달리고 있어서,
촉촉한 우리의 바디는 긴 신호대기 앞에 멈춰야 한다.
오늘은 조금 서둘러서 그런지,
햇살이 늦잠을 잤는지
우리에게 기회가 왔다.
깜빡~깜빡~
햇빛이 지상으로 좌회전하려고 깜빡이를 켰다.
충분히 일찍 출발했다고 생각했는데, 녀석들의 스피드를 감안하면~
아! 조금 더 빨리 달려야겠다.
정속주행을 하다가는 금새 추월당할까 두렵다.
오잉!
러시아워는 아닌데,
뭔가 속도가 느려진다.
하늘에서 낙하하는 속도가 얼마나 느려졌는지 다른 사람은 눈치채기 어려워도,
레이서는 미세하게 체감되는 속도 저하에 불안감을 느낀다.
진눈깨비인가?
색을 구분하기 어려운 무채색 입자들이 떠 있다.
시야가 점점 좁아지고,
몸은 무거워진다.
어느새
빗방울이 MSG를 한모금 마셨다.
MiSemonGi
소화가 안된다. 왠지 짝퉁,
불량식품같은 느낌이다.
'하늘이 흘린 눈물'이라는 이름으로 네이밍되어,
명품브렌드로 론칭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
짝퉁 공기에 스크레치가 생긴 것 같아 영 마음이 개운치 않다.
게다가 요즘은 MSG의 함유량이 늘어나면서,
조금만 먹어도 쉽게 졸음이 몰려온다.
낮잠이라도 잠시 자...야...하는가.
아직 출근중인데....
ZZZ
대지의 촉촉함에 도착하여 출근카드를 찍어야 하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
거짓말같이 결승점을 불과 몇 미터를 앞에 두고
나뭇가지가 방해한다.
나의 출근길을 막아섰다.
내 앞길을 막은 것은 상대방인데,
전방주시의무를 소홀히 했다고 가해자란다.
하~
땅에 몸을 박고 살면서 꼼짝도 못하는 녀석이랑 책임이 몇대몇인지 싸우는 것도 챙피하고,
그냥 내가 잘 못 한 것으로 하자.
다른 빗방울이 사고 현장을 구경하느라 엉금엉금 기어가고
나는 나뭇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내가 사고를 친 건 사실인것 같다.
졸음 운전에, 짝퉁같다는 오해에, 교통사고까지 내다니...
어제 밤에 음주를 한 게 아니냐는 추정기사까지 내보냈다고 하니
체면이 말이 아니다.
나랑 부딛친 이 나무는 연식이 좀 된 녀석이다.
나이테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풍미를 지니고 있다.
가해자다 보니 마음이 쭈뼛거리고 있는데, 뒷목 잡고 있던 나뭇가지가 입을 연다.
"웰아유프롬"
아직 말을 버벅거리는 것 보니, 내가 너무 쎄게 박았나보다.
"웰!이 아니라 웨얼~!"이라 지적질이라도 해줘야 속이 편할 것 같지만, 그냥 품격있게
"프롬 헤븐"이라고 답한다.
"어떤 하늘?"
하~ 정말 귀찮다.
외국가서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면, 남쪽인지 북쪽인지 물어보는 게 그 다음 질문인것처럼,
내 옷차림 보면 대한민국의 하늘에서 온 티가 안나나?
K-sky 라고 또 친절하게 알려줘야 하나?
그래 뭐 성질이 좀 나지만 인내심을 가지자.
올해 목표도 그거 아니였나?
착하게 살자!
도란도란이야기하는것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난가해자 넌피해자 하며 보험회사 부르는게 상식인데,
미안한 마음 누그려 주시는지 자꾸 이런저런 질문을 한다.
미세먼지에 눈이 침침해졌을 가능성에 대한 기사를 봤다면서,
광합성 전문 잎사귀를 담당하는 기자님이 한 말씀 거든다.
심층취재를 해봤더니 광합성의 연료로 쓰이는 햇살도 요즘 예년만 못하단다.
그런데, 기러기가 지나가면 햇빛도 낯을 가린다고 주장하는 기자들도 있어서
데스크에 올리지 못할 뿐이란다.
뭔 개소린지...
그래도 조금 덜 미안하긴 하다.
눈길에 차가 위험하듯이
미세먼지로 인해 시야가 방해를 받아 빗방울이 경로이탈한 것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판결이 나왔다는 귀뜸도 해준다.
그리고, 가해자도 치료받을 수 있으니,
자기 나뭇잎 곁에 붙어 있는 열매에 붙어서 찜질이라도 좀 하고 가라고 한다.
하하하
어짜피 출근도 늦었는데, 아예 사고처리라도 완료되고나서 들어갈까보다.
성실한 사람인데, 불의의 사고 한 번이 사람 아니 빗방울의 판단을 오락가락하게 한다.
그런데, 이 나무의 배려가 또 각별하다.
좋은 물을 머금은 뿌리에서부터 물관을 통해 신선한 수분이 촉촉히 올라온다.
또한 그동안 받은 좋은 에너지가 오늘 만난 나를 친구삼아준다.
명품물방울 출신이 MSG를 만나 명성을 잃게된 내 사연을 이야기해줬더니,
그냥 고생없이 출근하는 일반 빗물과는 달리
자신들의 가지에 대롱대롱 달려서 미세먼지의 때를 씻어내고,
과일향 은은하게 함유된 자신들의 풍미를 채색하기만 하면,
더 영롱한 명품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고 넌지시 알려준다.
아무곳에서나 맞을 수 있는 물방울과는
태생이 다르다고??
금수저가 니 숫가락이냐?
은수저가 니 숫가락이냐? 따위의 숟가락타령이나 하는 사람들에게
다이아몬드 물방울이 왔다고 홍보하자고 한다.
가해자의 콧대가 다시 높아진다.
자존감이 다시 회복된다.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고급진 물방울로 변신하느라
꽤 긴시간 나뭇잎에 메달려 있다가,
마케팅 DNA가 잔뜩 묻은 나뭇잎의 코치를 받던 중
미끄러져서 자유낙하를 시작한다.
마침 그 장면을 내가 올려다 본 게 아닌가
똑~!
내 이마에 그 물방울이 한 방울 떨어졌다.
항공기도 멈추고
여행사도 어려운데
물방울의 여행이야기라도 들어줘야할 것 같아
이마에서 뺨으로 흐르는 그 짧은 시간동안이나마
예의를 갖춰 들어줬다.
고급진 물방울
금수저 물방울
참 언제부터 빗방울이 이리도 말이 많았는지,
귀가 간질간질하다.
내 뺨에 머무느라 아직도 이 땅에 랜딩하지 못한 물방울은
언제쯤 사명을 다 할 수 있을까?
혹시 내 피부속에 스며들었으면 어떻하지?
나도 고급진 물방울을 머금은 명품사람이 되는거야?
하~ 코로나로 힘든 시기를 보냈더니,
사람이 이런 상상도 하게 되나보다.
아니면 호메로스 아저씨의 뺨에 흘렀던
그 물방울이 방황하다가 지금 내 이마에 떨어진건가?
시간이 다 되었다.
이쯤에서 그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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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바이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