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경제 8

기억의 상처, 새해의 소망

“기억나니?” 수개월 전 처음 알게 되어 여러 번 찾아갔던 도서관. 조용하지만 보물 같은 문장들을 숨겨놓은 놀이터, 지쳐서 엎드려 자던 학생도 쌩쌩한 걸음으로 걸어 나가게 하는 곳 ^^ 오래된 건물이지만 사람의 머리 속을 새롭게 하는 곳. 다시 만난 도서관은 화장을 했네요. 낡은 빛깔은 온데간데없고, 화려한 햇빛을 반사시키는 건물의 창문에는 지혜의 빛이 반짝이며, 도서관 내부를 걸을 때면 또각또각 구두 소리 같은 똑똑함이 묻어납니다. 기억하고 있던 것과는 너무 달라진 공간은 오랜만에 다시 만난 설렘을 쉽게 잠재웁니다. 도서관의 모습이 달라졌다고 머리가 살짝 어찔어찔합니다. 책의 단어와 문장은 도서관이라는 숲이 뿜어내는 공기와 어우러져 뇌세포의 빈자리 어딘가에 꽂히게 되는데, 너무 정갈해진 책장은 기억을 ..

몽땅연필의 귀환

연필은 단점이 많습니다. 아무리 정성껏 깎아도 조금 쓰고 나면 연필심의 날카로움은 쉽게 잃어버립니다. 또한 같은 자세로 쓰다 보면 연필 한 쪽 면이 닳아서 갸우뚱해지는데, 이런 오류를 잡기 위해서는 몇 글자 쓰다가 연필을 돌려 잡아서 선명한 글을 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약점을 능가하는 치명적인 단점은 쓰면 쓸수록 키가 줄어든다는 점입니다. 글씨를 많이 써서 줄어들기도 하며, 연필 깎을 때의 힘 조절에 실패하여 부러지기도 하지만, 연필을 지렛대 삼아 졸다가 잠을 깨우는 툭 소리와 함께 연필심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투박하고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연필에 위협하는 존재가 탄생합니다. 세련된 은빛 옷을 입은 샤프는 연필을 깎아서 날카로움을 유지해야 하는 것과 같은 준비과정이 전혀 필요 ..

여행의 뒷모습

때론 여행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게 기억될 때가 있다. 처음 가보는 여행지를 상상하며 어떤 음식을 먹고, 무엇을 볼 수 있을지 상상하며, 여정을 고민하며 동선을 짜는 일은 여행의 근간이 되기에 매우 중요하다. 정해진 여정을 따라가는 편리함 대신 복잡하고 귀찮은 이 과정을 직접 준비할 때에는 여행의 순간순간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는 장점이 있다. 뿐만 아니라 불확실성을 지닌 여행이란 터널을 지나 마주칠 뜻밖의 즐거움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그 기쁨은 더욱 선명하게 기억에 새겨진다. 그러한 여행에서 목적지의 도착은 여행의 기쁨을 누리던 중 받게 되는 보너스처럼 여겨질 뿐이다. 이런 측면에서 환자를 만나는 일상은 완치라는 목적지를 향해 함께 가는 여행과 같다. 단 한 사람도 같은 유전자를..

통증 주제에 의한 변주곡

나는 매일 아침 음악을 만난다. “다친 다리가 얼마나 저린지”로 시작하는 메조소프라노의 노래는 다리를 관통하는 찌릿찌릿함을 연주하는 현악기의 트레몰로(tremolo)와 합쳐져서 힘든 하루의 시작을 긴장감 있게 표현한다. “어제 마신 술의 여독이 풀리지 않아 아픈 내 머리여~” 멋진 바리톤의 음색은 투우사의 노래 같은 어제의 호기로움이 아침의 숙취로 변했음을 장황하게 설명하는데, 서라운드 시스템 하나 없는 한의원에 쩌렁쩌렁하니 울려 퍼진다. 분위기상 첼로의 낮고 따스한 소리가 뒤따라야 할 즈음에, “호호호호~~” 마치 연극무대에 어울릴 듯한 소프라노의 경쾌한 음색은 “이랬다 저랬다 하는 통증의 다양한 모습”을 다양한 표정으로 표현한다. 숨은 언제 쉬나 걱정될 정도의 빠르기를 진정시키려는 듯, 지휘자의 손끝..

기억해야할 것과 누려야할 것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이 아닌데, 잡지에 기고할 기회가 왔습니다. 벌써 8년 전 이야기네요. 한의학 이야기를 써 달라고 요청받았으나, 한의학 자체보다는 한의사로 진료하는 현장에서 느끼는 삶의 모습들을 그려냈던 것 같아요. 한 달에 한 번 A4 한 장 반 정도의 분량을 쓰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잡지라는 지면에 올라온다는 것은 사실 큰 부담이었습니다. 한달 내내 다음 달엔 뭘 쓰지 고민을 하곤 했지만, 정작 첫 줄을 쓰게 되는 것은 마감일의 3일 전쯤 되었던 것 같습니다. 글을 시작하기 위한 시동이 걸리기 위해서는 책장에서 한 없이 쉬고 있던 책들을 펼쳐 보기도 하고, 어떤 철학자가 그랬던 것처럼 걸어보기도 했으며, 서점에서 몇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머리를 굴리면, 펜도 굴러가는 신기한 경..

언제 끝나나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이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 삶의 한 지점, 불편함을 만나게 되는 때에 주인공은 환자라는 이름으로 찾아옵니다. 첨단 검사 기계와 수술이 없는 한의원이기에 다양한 증상을 지닌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발목이 삐끗했을 때 잠시 출연하기도 하고, 오랜 시간 서서히 무너진 어깨로 인하여 꽤 오래 손봐야 하는 분도 있으며, 본인은 불편한데 검사에는 나타나지 않는 다양한 증상을 지닌 분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간혹 다양한 증상의 조합을 지닌 분이 처음 오시기라도 하면 나 같은 환자도 본 적 있는지 물으며 대화를 시작합니다. 아무리 아픈 곳이 많고, 불편한 증상이 여러 곳이어도 주된 증상은 하나입니다. 물론 온몸이 다 아프고 괴로운 '섬유근통'과 같은 경우도 있지만, 주 ..

신용경제. 삶의 복원과 건강의 복구

시간이 흐르면 사람도 예술품도 나이를 먹는다. 사람은 좋은 공기를 마시고, 건강한 식사를 통해 천천히 늙을 수도 있고, 예술품은 습도와 온도 등을 잘 조정한 최적의 환경에서 보관하면 손상을 줄일 수 있지만, 사람이건 예술이건 완벽한 형태와 기능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척추’라는 조형물이 내려 앉아 협착이 되고 ‘무릎’이라는 작품이 퇴행되어 세상을 호령하던 보폭이 뒤뚱거려질 즈음 인간 예술품은 환자라는 이름으로 내원한다. “퇴행성이래유~” “척추가 내려 앉았다 하네요.” 어린 아기로 태어나서 두발로 걸으며 생명력을 발휘해 온 최상의 작품이지만, 하루하루 삶을 살아내고 세월을 이겨내면서 피로는 누적이 된다. 과적된 피로를 견뎌 내던 뼈마디의 힘이 떨어지고, 관절 이음새의 유연성이 줄어들면서 슬금슬금 ..

거인의 어깨도 아프다.

근대 과학계의 거인으로 불리는 뉴턴은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있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부모가 어린 자녀를 무등 태우듯 어깨 위에 올린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성공을 훌륭한 선배들이 닦아 놓은 학문 덕분임을 인정하고 감사를 표하는 거장의 겸손함이 묻어나오는 멋진 문장이다. 우리 모두 뉴턴처럼 각 분야의 거인은 아니지만, 각자 누군가에게 어깨를 내주고 살아간다. 어린 애기를 업어서 키울 때, 오랜 시간 안아주기 위해 ‘애기 띠’로 묶을 때, 부모의 어깨는 아이에게는 거인의 어깨와 같다. 또 무등을 태워서 놀아주는 것은 어린 시야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을 부모의 눈높이에서 잠시나마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데, 아가들 입장에서는 세상에 자신이 보는 것이 다가 아님을 깨닫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