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4. 글쓰는 시간/24일. 신용경제

언제 끝나나요?

진리의서재 2020. 10. 26. 06:45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이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 삶의 한 지점, 불편함을 만나게 되는 때에 주인공은 환자라는 이름으로 찾아옵니다. 첨단 검사 기계와 수술이 없는 한의원이기에 다양한 증상을 지닌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발목이 삐끗했을 때 잠시 출연하기도 하고, 오랜 시간 서서히 무너진 어깨로 인하여 꽤 오래 손봐야 하는 분도 있으며, 본인은 불편한데 검사에는 나타나지 않는 다양한 증상을 지닌 분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간혹 다양한 증상의 조합을 지닌 분이 처음 오시기라도 하면 나 같은 환자도 본 적 있는지 물으며 대화를 시작합니다. 

 

아무리 아픈 곳이 많고, 불편한 증상이 여러 곳이어도 주된 증상은 하나입니다. 물론 온몸이 다 아프고 괴로운 '섬유근통'과 같은 경우도 있지만, 주 증상은 1번부터 시작합니다. 소화가 안 되는 것이 1번 타자일 수도 있고, 두통이 제일 큰 문제일 수 있으며, 등이 불편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기도 합니다. 그 하나의 증상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 몸이 힘들었는지 설명하거나, 단 한 번의 삐끗함으로 증상이 이럴 수 있는지 억울함을 호소하는 표정에는 주인공의 고통의 정도와 치료받고자 하는 의지가 잘 드러납니다. 그러하기에 이 여정에 참여할 결심을 저 또한 하게 됩니다.

 

단편소설과 같은 하루의 진료는 시작되고, 환자와 고통이 만들어낸 갈등을 이해하며, 작가가 주인공의 상태를 정제된 언어로 표현하듯 하나의 침(Acupuncture)이 단어가 되어 적절한 치료의 문장을 구성하기 시작합니다.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 구사된 환자의 언어는 아이러니하게 시어와 같이 단순하게 정리됩니다.  

 

좌섬요통! 담궐두통! 간기울결!

 

환자의 스토리가 단순한 진단 용어로 수렵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언덕 위에 서 있는듯한 불안함과 주홍 빛 고통을 쏟아내는 순간을 마주하면 때때로 글을 읽는 독자처럼 동감하게 된다. 공감이 절대 나쁘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진료를 할 때 이내 평론가 같은 냉철함을 지녀야 하는 까닭은 고통의 입말을 객관적 글말로 동시통역을 한 뒤에 치료에 대한 전략을 세워야하기에 고통을 전문용어로 객관화되는 과정은 중요한 단계입니다. 

 

독자의 인생에 진한 공감은 필요하지만 너무 빠지게 되면 다음 발걸음이 무거워집니다. 충분히 이해하지만 냉철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명의가 되기 위한 덕목일지도 모릅니다. 아군이 쓰러지는 전투 상황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아야 되는 야전사령관의 냉정함에 빗댈 수 있을까요? 브레인이 해야할 일은 빠르고 정확한 판단을 내려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정의의 칼과 창으로 사용되는 '침'이 정확한 과녁을 향해 투입될 수 있으니깐요.

 

매일매일 증상이 바뀌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제와 다른 지점, 지난번과 변화된 증상, 거기는 괜찮은데 여기는 불편하다는 보고는 마치 눈 앞의 적을 제압했더니, 안개 뒤 숨어있던 10m 뒤 적군이 달려오고, 그 뒤에는 매복하여 숨죽인 적의 연합군이 언제 모습을 드러낼 줄 모르는 상황과 흡사합니다.

 

그냥 빨리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침 한 대 놔 드리면, 마주카포 쏜 것처럼 사악한 기운이 싹 다 사라지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아픔은 빨리 '기승전'에서 '결'로 가지 않습니다. 

 

영화만 해도 예전에는 2시간이면 끝났습니다. 아무리 심오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도 그 시간 안에 잘 짜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12부작이나 16부작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품이 많아졌습니다. 갈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개되어 오락실 앞에 있는 두더지처럼 계속 머리를 들이밉니다. 뿅망치를 든 손이 아플 때 즈음에야 마지막 회가 다가오는데, 다 끝났다 생각하는 지점에서 다음 시즌을 예견하는 실마리를 남겨 놓기도 합니다. 우리의 주인공은 언제쯤 편히 쉴 수 있을까요?

 

제가 만나는 저희 환자, 아니 주인공의 삶도 해피엔딩으로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예전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갈등이 다양한 증상으로 주인공을 괴롭히는데요, 지나가는 행인처럼 단역으로 끝나야 하는 우리의 역할이, 조금은 긴 호흡을 지녀야 하는 조연으로 바뀐 것 같습니다. 

 

마치 단편소설을 쓰다가 불이 번지듯 일어나는 예술혼을 잠재우지 못해서 장편소설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위화는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김태성 역)이란 책에서, 단편으로 구성하려던 작품이 <허삼관 매혈기>라는 장편소설이 된 연유를 설명하면서 헤밍웨이가 자신의 장편소설은 모두 단편소설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 내용을 언급합니다. 한 사람의 단편적인 증상을 치료하는 저에게도 꽤 긴 시간 함께하는 환자들이 늘어나면서 헤밍웨이나 위화 같은 작가의 말에 공감됩니다.

 

힘들게 살아온 삶이 투영되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는 박완서 작가의 노년 소설 속 주인공을 떠올리게 하고, 여드름 많던 6학년 아이가 취업했다고 제 돈으로 사 온 케이크를 맛보고 있자면 성장 소설 속에 늘 등장하는 어른이 된 기분입니다. 

 

단편으로 시작한 오늘의 환자는 또 어떤 인생의 소설을 쓰게 될까요? 분명 고통과 아픔으로만 가득 차지 않을 것입니다. 그 속에 희로애락이 다 있겠지만, 오늘의 만남이 그분들의 긴 삶의 여정에 조금은 멋진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되길 꿈꾸어 봅니다.

 

인생은 아픔과 고통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훨씬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깐요.

 

 

신용경제 2020년 11월호 기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