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이 아닌데, 잡지에 기고할 기회가 왔습니다. 벌써 8년 전 이야기네요. 한의학 이야기를 써 달라고 요청받았으나, 한의학 자체보다는 한의사로 진료하는 현장에서 느끼는 삶의 모습들을 그려냈던 것 같아요.
한 달에 한 번 A4 한 장 반 정도의 분량을 쓰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잡지라는 지면에 올라온다는 것은 사실 큰 부담이었습니다. 한달 내내 다음 달엔 뭘 쓰지 고민을 하곤 했지만, 정작 첫 줄을 쓰게 되는 것은 마감일의 3일 전쯤 되었던 것 같습니다. 글을 시작하기 위한 시동이 걸리기 위해서는 책장에서 한 없이 쉬고 있던 책들을 펼쳐 보기도 하고, 어떤 철학자가 그랬던 것처럼 걸어보기도 했으며, 서점에서 몇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머리를 굴리면, 펜도 굴러가는 신기한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돌이켜 쓴 글들을 보면, 당시 읽고 있었던 책들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말들의 풍경]을 읽을 때는 우리말을 조금 잘 써보려 했었고, [기억을 찾아서]를 읽던 동안에는 통증을 기억하는 몸에서 건강한 기억을 만들기 위해서 돌이켜야 하는 것을 제안하고 싶어 했네요. 승효상, 임석재 선생님과 같은 건축가가 쓴 책이 품에 있을 때는 우리 몸의 구조에 대한 내용을 풀어내려 했었고, 번역가 선생님들의 글을 읽을 때는 한의학을 2020년의 언어로 번역해 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글을 담겨 있네요.
칼럼에는 읽던 책뿐 아니라, 글을 쓸 때의 제 모습도 보입니다.
홍매화에 대한 글에는 창덕궁에서 맞이한 봄이 있었고, 족저근막염에 대한 글에는 동네를 걷던 중 만난 꽃향기가 어우러진 바람결이 불어옵니다. 침 잘 놔서 환자의 생기를 끌어 올리고 싶은 바램은 평창올림픽이 한창일 때 떠올린 손기정 선생의 월계관과 월계수가 탄생한 이야기에 실려있고요.
잊고 있었던 과거의 제 모습과 생각, 진료하면서 고민했던 마음과 읽던 책과의 교감이 신용경제에 실린 제 칼럼 속에서 숨 쉬고 있네요. 훌륭한 작가님들이 자신의 생각과 삶을 글로 옮기는 것은 유한한 오늘을 박제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 박제라는 표현보다는 늘 살아있게 하고 싶어서는 아닌가 생각됩니다.
환자에게 놓아 드렸던 침은 지금도 건강한 방향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겠죠? 그렇게 믿고 싶네요. 불면의 밤, 야식의 포만감, 불규칙한 삶의 리듬이 만들어내는 피로감의 지배력이 커지는 오늘날에 막혀있던 기운의 흐름이 뚫고, 부족했던 혈을 회복시켜 생명력을 회복하길 바라며 치료했던 순간들의 노력이 차곡차곡 쌓여서 몸이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좋은 것을 기억해야 혹시 다가올 힘든 날에 그 날을 추억하며 다시 힘을 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오늘 먹은 좋은 음식이 꼭 오늘의 삶만 위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받은 스트레스가 오늘만 괴롭히는 건 아닌 것처럼요.
긍정이든 부정이던 오늘의 삶의 모습은 남은 삶에도 조금씩 스며들어갈 거예요.
누려야 할 것들이 참 많지만, 소중한 시간임을 건강한 때에는 잘 모르고 지나갑니다.
걸을 수 있을 때 동네 한 바퀴 걸어가면 삶의 활력을 얻게 되고, 온전히 호흡할 수 있을 때 나무와 꽃의 향내를 마신 것이 머리를 좀 더 맑게 해 줄 거예요.
문득 신용경제에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에 본 한 개그우먼의 대사가 떠오릅니다.
지금은 부자가 되었지만, 가난했던 시절의 기억이 오늘의 삶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 것을 재미있게 보여준 내용입니다. “누려”라는 유행어로, 이제는 여유로워 졌으니, 좀 더 삶을 누려보라는 권고에도, “제 몸이 가난을 기억해요”와 같이 응답합니다.
웃고 지나갔던 순간이지만, 우리는 누릴 수 있는 건강을 더욱 잘 누려야 하고,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잘못된 습관을 몸이 기억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합니다.
금연에 성공하여 좀 더 맑은 폐(하루 아침에 되지는 않겠지만)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살지만, 몸이 자꾸 흡연실로 향하는 경우도 있겠고요, 다이어트 노력 3일 차인데,조금은 가벼워진 몸으로 하루를 경쾌하게 누리지 못하고, 식탐이 나를 기억하는 듯 다시 폭식에 빠지곤 합니다.
오늘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 오늘 바르게 치료하는 것, 오늘의 삶을 정직하게 글로 남기는 것은 각기 자신의 몸, 환자의 건강, 독자의 생각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귀한 잡지의 한 켠에 삶과 생각의 발걸음을 남길 수 있어서 큰 기쁨이었습니다. 신용경제에 글을 남기신 분들과 그 글을 읽으신 분들, 그림과 사진을 찍으신 분과 그 작품에 위안을 받은 분들이 모두 아름다운 기억을 안고, 더 멋지게 한 걸음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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