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는 참 길다.
길고 긴 이야기의 끝은 '마지막 왕'의 야반도주다.
사실 21살에 왕이 되긴 했지만,
뭘 좀 안다고 하기엔 그렇고,
아버지가 성군이시긴 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나라가 좀 기울어간다.
왕이 된 형제는 이집트에 끌려가질 않나
이어서 왕이 된 형은 '나라가 끝장난다'라는 예언을 듣지를 않나
왕자로 안락함을 누리기보다는,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왕이 되었다.
형제가 이집트로 끌려가고, (동생 여호아하스)
전쟁으로 죽기도 했으며, (형 여호아김)
(또 그 이후에 조카 여호야긴은 바벨론으로 ㅠ.ㅠ 끌려감)
혼란한 시기에 왕이 된 시드기야.
그러다 결국은 도망가다 끝장난 마지막 왕.
도망 왕!으로 낙인찍혔지만,
처음부터 하나님 말씀에서 도망간 자는 아니었다. 1)
'동족을 노예로 삼지 말고, 자유를 줘라!'
위로는 바벨론, 아래로는 이집트의 위협 속에
풍전등화와 같은 시기에 왕이 된 자에게 하나님은
두 나라의 무력을 이겨낼 수 있는 군사력을 증가시켜준다던지,
기적으로 두 나라를 멸망시켜준다던지 그러지 않으시고,
'동족에 자유를 주라~!'는 말씀을 주신다.
처음에는 그 말씀을 잘 지켰다. 하지만,
노예를 많이 보유했던 지주의 청탁이 있었는지,
한 번 잘 듣긴 했지만, 하나님이란 분의 말도 중요하지만,
가까이 있는 경제인, 정치인의 계속된 로비에 참 모른 체하기도 어려워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그 결정을 뒤집는다.
노예로 있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려 했을 때,
결국 마지막 심판 - 장자의 죽음 - 을 겪고서, 다 떠나라고 한 이집트의 왕이
정신이 번쩍 들어서 '노예가 없어지면 얼마나 손해인데'라고 생각하여
다시 추격했던 장면과 비슷하다 볼 수 있을까?
하나님 뜻에 순종하다가, 갑자기 '웬 손해인가?'라고 생각해서
"자유법! 취소! 취소!"
이랬을지도 모른다.
성군인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는가 싶더니,
샛길로 ㅠ.ㅠ 악한 왕의 길로 빠지기 시작한다.
원래 이 나라는 왕이 없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인데
백성들이 '왕을 달라' 요구해서 왕을 주셨다.
다윗왕이나 솔로몬 왕의 시대처럼 번영을 누릴 때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자녀 대하듯 백성을 생각하지 않고,
왕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통치하지 않을 때,
나라는 기울어가고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다.
이집트에서의 탈출을 성공한 후에 광야에서 살아갈 때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삶의 어려움으로 노예(노비)가 된 동족이 6년간 봉사하였다면 7년째에는
자유롭게 놓아주라고 말이다. 2)
그런 하나님!
왕이지만 사람을 노예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유를 주시는 참 왕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인간인 왕은 깨닫지 못했다.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처럼 백성을 통치하라고 주신 기회가 아녔을까?
이 젊은 왕은 잠시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랐다.
하지만 이내 뜻을 바꿔서 자유를 줬었던 노비들을 다시 복종시켜서 노비로 삼았다.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던 건가...
형제와 이웃의 자유 선언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결과는 참혹했는데,
칼과 염병과 기근을 벌로 받게 된다.
코로나의 시대가 되니 '염병'이란 단어가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전쟁의 시기라면 '칼'이,
부모님 세대였으면 '기근'이 눈에 크게 들어왔을 것이다.
기회를 주고,
심판의 메시지를 통해 나타내고 싶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된 길만 걸어간 시드기야의 삶을 역사책 보듯 바라볼 때에는
뭐 이리 나약하고, 불순한 거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안의 청소년기를 거치며 왕이 된 어린 임금
조금 잘하다가,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가며 실수하고 잘 못하는 나의 모습과 뭐가 다르지? 하는 생각이 번쩍 든다.
남의 인생을 볼 때의 비평은 쉽지만, 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자신에 대한 자각은
단순히 불쌍하다, 바보 같다 라는 말로 쉽게 마무리할 수 없게 만든다.
무조건 '하나님께 순종해야지!'라며 원론적인 말은 잘하나,
삶의 매 순간마다 '나는 왜 이렇게 남을 배려하지 못하나.', '참! 나는 이기적이다'와 같은 생각에 도달하게 되면,
아이들에게 그렇게 되길 바라며 늘 권유하는 '멋진 삶'이나 '훌륭한 인간의 모습'에서 한참이나 멀어진 내 모습올 본다.
머리로는 잘 알고,
말로 하기는 쉽지만,
살아내기는 만만치 않은 진리 앞에,
연약한 마음과 두부 같은 결심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비록 결심은 했지만,
힘든 일이 있으면 '아까맨치로' 하면서 돌아가는 그의 삶이 (아니 내 삶이) 왜 이리도 애처로운지...
시드기야의 '불안과 나약함'과 비슷한 체질을 지닌 사람으로
그의 삶에 동질감과 동료의식도 들지만,
시드기야 왕의 실패, 불순종의 길에서는 - 혹 그 길 위에 서 있다면 - 돌이키고 싶다.
형제와 동족이 자유를 얻는 것을 '정의'로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더 알아가면서,
조금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과 내 감정을 괴롭히는 이에게도
조금은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는건 어떨까?
스스로에게 이야기한다.
예배를 드리고 있으니 삶은 좀 그래도 난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했고,
주일의 예배시간에 또 '한 주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고'라는 기도로 모든 평화를 누렸던 것에서
그 일상화된 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건가?
라고 생각케 하는 예레미야서이다.
예배만 드리는 것이 의로운 길의 전부가 아니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의 길이며 생명의 길임을
예수께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하시고, 이어서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신 말씀으로 확증하셨다.
나 자신!
의의 길로 걸어가자 쫌!!
걸어가다가 자꾸 도망치지 말고!!!
라고.....
다시 다짐해 본다.
...............................
1) 예레미아 34장
2) 출애굽기 21장 2절, 신명기 15장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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